한용운은 왜 시와 소설을 썼는가?
-불교·현대·문학이라는 사건의 충돌
김춘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교수
배를 띄우는 흐름은 그 근원이 멀도다. 송이 큰 꽃나무는 그 뿌리가 깊도다.
가벼이 날리는 떨어진 잎새야 가을바람이 굳셈이라.
서리 아래에 푸르다고 구태여 묻지 마라. 그 대(竹)의 가운데는 무슨 걸림도 없느니라.
미(美)의 음(音)보다도 묘(妙)한 소리. 거친 물결에 돛대가 낫다. 보느냐 샛별 같은 너의 눈으로 천만(千萬)의 장애(障礙)를 타파(打破)하고 대양(大洋)에 도착(倒着)하는 득의(得意)의 파(波)를
보이리라 우주(宇宙)의 신비(神祕). 들리리라 만유(萬有)의 묘음(妙音).
가자 가자 사막(沙漠)도 아닌 빙해(氷海)도 아닌 우리의 고원(故園). 아니 가면 뉘라서 보랴 한 송이 두 송이 피는 매화(梅花)
(한용운, 「처음에 씀」, ⟪유심⟫ 창간호 서문)1)
인용한 시는 만해 한용운의 ⟪유심⟫ 창간호 서문으로 쓴 것인데, 그 표현과 내용이 다분히 불교적인 선시의 시풍과 화법을 지니고 있으며, 독자에게 대중적인 설법의 형태로 다가가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사물의 외양과 현상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불교적인 지혜를 통해서 근원적인 뿌리를 깨우치라는 내용으로 ⟪유심⟫이라는 잡지와 한용운의 사상이 지닌 핵심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심⟫ 창간호(이미지 제공: 만해기념관)
만해 한용운이 1913년 ⟪조선 불교유신론⟫을 발행한 이후 1918년 ⟪유심⟫을 창간하고 그해 12월까지 3호를 발간하다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3.1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3년간 옥고를 치루고 1922년 3월 풀려 난 뒤, 1925년 백담사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기까지의 과정은 서로 연관을 지어서 긴밀히 살펴봐야 하는 대목이다. ‘불교의 유신’과 ‘유심’, 그리고 ‘조선의 독립’, ⟪님의 침묵⟫이라는 종착점은 이 점에서 하나의 ‘도정’에 해당된다.

조선불교유신론(이미지 제공: 만해기념관)
승려인 만해가 왜? “시를 썼는가?”라는 질문과 한국 현대시 혹은 현대문학 속에 ‘불교’가 “어떻게 접목되었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역사의 한 장면’으로 포착될 때 비로소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님의 침묵⟫의 문체가 지닌 순한글체와 연애시적 화법 등은 김억이나 김소월 등 당시 문단의 ‘현대시 운동’이 끼친 영향, ‘타고르’라는 인도 시인의 영향 등이 두루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심이 종간된 1918년 12월과 3,1 독립운동 참여로 인한 3년간의 옥고로 인한 ‘공백 기간’의 의미이다. 투옥으로 인한 불교, 정치, 문학의 활동이 중지된 지점에서 이 ‘공백’은 사실 공백이 아니라 ‘변화’의 계기로 작용하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보인다. 1925년 불과 몇 달에 걸쳐서 ⟪님의 침묵⟫을 완성했다는 문학사적 기적은 어쩌면 이 긴 공백을 포함한 도정이 예고했던 최종 종착점이 아닐까.
한용운의 시풍과 화법의 놀라운 변신은 당시의 상황 속에서 하나의 ‘기적’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918년부터 1922년의 강제적 칩거의 시간이 있었고, 또 1922년부터 1925년 사이 당시 신문학 운동의 급격한 전개와 성장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 어쩌면 필연적인 ‘사건’으로까지도 여겨지는 것이다.
불교의 ‘유심’에 의한 지혜, 불교 유신과 독립, 그리고 유심을 근거로 한 지혜를 시와 문학의 화법에 적용하는 일은 일정한 시간적 경과와 도정을 통해서 표출되었지만, 실상은 하나의 일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평가가 될 것이다.
불교와 조선의 독립, 그리고 불교와 문학의 만남, 불교와 근대의 결합은 유심이 유신과 ⟪님의 침묵⟫이 되기까지의 역사적 장면들을 통해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조선 불교계 잡지 ⟪조선불교진흥회 월보⟫와 수송동이라는 상징성
1895년 ‘승니입성금지령’이 해제되면서 불교계 종교 활동과 문화 운동이 조선의 도성 ‘한양’과 식민지 도시 ‘경성’이라는 공간에서 비로소 가능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내내 ‘산중 불교’로 소외되어 온 ‘불교’가 도성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대전환점’에 해당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불교의 유신은 한말의 국권 상실, 식민지화, 근대화라는 격동 속에서 그 방향을 잡아야 했기에 한 동안 많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근대적 종교로 스스로를 혁신해야만 하는 과제에 직면한 ‘불교계’의 가장 커다란 과제는 당시의 모든 교육, 정치, 사상, 문화운동이 그렇듯이, 신학문 습득, 근대적 교육기관 설립, 통일된 단체 구성, 인쇄, 출판 등의 근대적 미디어 제도를 갖추는 것이었고 비록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런 활동은 1910년대 식민지 도시 경성의 중심지인 종로(수송동)일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북쪽의 원종과 남쪽의 임제종 사이의 갈등, 총독부의 조선불교사찰령 등에 의해서 불교의 유신과 국권 회복, 문화 운동 등에 일정한 장애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불교계도 산중의 선가 중심적인 수행불교를 벗어나서 ‘경성’이라는 상징적 중심지에서 문화 활동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한용운이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등을 발간하는 1910년대이다. 불교의 개혁과 유신, 그리고 근대적 문화운동으로의 불교를 지향하는 과정은 ‘불교’의 도성 진출 즉 근대도시 경성에서의 ‘불교 운동’으로 표면화되어 나타난다. 이 수송동 일대에서의 불교계의 활동은 상징적인 측면에서 ‘승녀입성금지령’의 해제와 함께 시작된 ‘근대불교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고 아이러니하게도 ‘국권상실’을 배경으로 활성화된 측면이 없지 않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가 창간되고 이후 1913년 ⟪해동불보⟫로 이름을 바꿔서 재간행 되는 것을 시작으로 ⟪불교진흥회월보⟫(1915), 조선불교계⟫(1916), ⟪조선불교총보⟫(1917), ⟪유심⟫(1918) 등의 잡지가 창간된다. 이런 불교계 잡지의 창간은 ‘근대적 불교운동’의 면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고 결과적으로는 이런 불교계의 문화운동이 자연스럽게 당시의 ‘신문학 운동’과의 결합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당시 수송동에는 30본산 주지들이 회합하던 원종 종무원 중앙포교당과 ‘승니입성금지령’ 해제를 기념해서 지은 각황사가 있었고, 근처의 사동에는 범어사에서 신축한 임제종 종무원 중앙 포교당이 있었다. 이후 1912년 6월 17일 각황사에서 거행된 30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선교양종으로 종지를 통일하면서 수송동의 종무원 중앙 포교당으로 일원화되지만 당시 이 지역은 승려를 포함해서 당시 불교계 지식인 엘리트(학인)등의 문화적 거점으로서 문학, 출판을 포함해서 활발한 문화 활동이 전개되는 중심지였다. 2)
1914년 8월 10일 각황사 내에 ‘불교진흥회’가 설립되고 기관지 ⟪불교진흥회월보⟫(1915. 3,15) 창간되는데, 이 과정은 당시 이능화, 양건식 등의 학인(불교계 지식인)들이 불교 근대화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는 한 장면을 보여준다.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령 해제, 종로에 사찰을 건립, 30본산 주지 회의를 개최와 불교 잡지 간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행보는 당시 불교계 근대적 문화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한데, 경성이라는 중심지에서의 불교계 활동은 곧 당시 문화 활동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던 ‘문학계’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양건식,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 등의 불교계 입문이나 교류는 그런 사실을 반증하는 사실 중 일부이다.
경성이라는 도시에서의 문화 활동이 ‘불교 유신’의 큰 핵심 축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승려의 도성 출입을 허가되고 식민지화가 연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불교’의 전통적인 사찰 중심의 ‘산중 불교’ 체제가 새로운 도시 문화 활동으로서의 불교, 불교 대중화로 전환될 뿐만 아니라 승려 교육의 중요성 증가로 인한 ‘교육기관’의 필요성 등 종단 자체의 근대적 제도 정비가 절실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후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한용운에게 불교의 유신은 불교의 선과 유심 사상을 바탕으로 ‘문화, 정치, 교육, 사상’의 전반에 걸쳐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그 근대적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승려 한용운이 독립운동가, 사상가, 시인 한용운이 되는 과정은 분화가 아니라 ‘불이(不二)’에 해당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적 성취’는 이 점에서 불교적 유심론이 ‘님’으로 완성되는 과정에서 불교, 민족, 독립, 중생, 자비심, 미, 지혜, 깨달음, 완성, 열반을 ‘불이(不二)’와 ‘화엄’의 상태로 가져가서 ‘시적 언어’로 유신(維新)해 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새로움’은 감각적인 것을 넘어선 불교적인 ‘깨우침’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형상에 매이지 않고 그 근원을 성찰하는 시적 사유를 ‘한국시’와 ‘시적 언어’에 부여해주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시의 현대성 안에 단순히 서구적인 영향만이 아니라 동양적인 사유와 가치,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불교적인 혜안과 형이상학적인 통찰이 수사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성취한 ‘님’과 ‘사랑’, ‘불교’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님의 침묵⟫ 초판본 표지(이미지 제공: 만해기념관)

⟪님의 침묵⟫ 초판본 내지(이미지 제공: 만해기념관)
1) ⟪유심⟫, 1928, 9. 1쪽. 인용은 필자가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현대어 표기로 고쳐 적은 것이다.
2)고재석, ⟪한국근대문학지성사⟫, 깊은샘, 1991. 26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