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선도, 논객 윤선도
자료구축부장 서영인
「어부사시사」와 “지국총(至菊悤)”
앞 개에 안개 걷고 뒤 뫼에 해 비친다
배떠라 배떠라
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려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
- 윤선도, 「어부사시사」, 봄, 1장
윤선도가 쓴 「어부사시사」의 첫 장이다. 아침이 밝아오는 시간 배를 띄우고 바다로 나아가는 모습이 담백하게 그려진다. 아침녘의 바닷가 풍경이 저절로 떠오른다. “강촌 온갖 꽃이 먼빛이 더욱 좋다.”라는 종장에서 풍경과 정서가 어우러져서 세상에 대한 동화와 경이가 뒤섞인 심정이 절묘하다.
입안에 넣고 따라 읽다 보면 “지국총(至菊悤) 지국총(至菊悤) 어사와(於思臥)”라는 여음구도 새롭게 보인다. 노젓는 소리를 음차한 한자어인데 마치 입말로 흥얼거리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사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윤선도가 창안한 음률은 아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의 강호미학을 표현하는 대표적 시제(詩題)였던 ‘어부가(漁夫歌)’ 계열의 시에서 관습적으로 삽입되던 여음구였다. ⟪악장가사⟫에 수록된 「어부가」에도 있고, 이를 수정한 이현보(李賢輔)의 「어부가」에도 등장한다. 같은 구절이지만 느낌이 다르다. 윤선도의 ‘지국총’은 한자어의 이질감이 없고 한글 문장과 어우러져 원래부터 있던 의성어처럼 느껴진다. “우리말의 연금술사”(고미숙)라는 평에 걸맞게 윤선도는 한자어도 우리말처럼 들리게 하는 마법을 부린다.
|
윤선도 ⟪고산유고⟫ 권1~권6(1798) |
윤선도 ⟪고산유고⟫ 권6, 「어부사시사」 부분(국립한국문학관 소장) |
할 말을 참지 않는다, 조선의 프로 상소러 윤선도
「오우가」의 자연을 벗하는 초연한 사상가, 「어부사시사」의 사계의 흐름을 따라 한정(閑情)의 이상을 누리는 풍류객의 인상과는 달리 윤선도의 삶은 격렬했다. 그의 정계 진출은 당시 최고 권력자를 비판하는 상소문으로 막을 열었다. 광해군 시기의 최고 권력자 이이첨을 비판한 「병진소(丙辰訴)」(1616년)는 당대 조정에서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당시 권력자의 악행과 그를 바로잡지 못하는 조정을 신랄하게 비판한 윤선도는 결국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했다.
신이 삼가 보건대, 근래에 전하의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역할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원들이나 일을 논하고 규율과 질서를 세우고 인재를 선발하는 일을 맡은 이들 가운데 이이첨의 심복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 윤선도, 「병진소」
비판은 권신과 임금을 가리지 않으며 상소문의 말미에는 죽음을 불사하겠다는 결의에 찬 발언도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함경도 경원의 유배는 다시 경상도 기장으로 이어졌고, 그가 유배에서 풀려난 것은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한 1623년, 7년만이었다. 30대의 한창 때를 유배로 보낸 셈이었다. 그의 유배는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1937년에 병자호란 때 모함을 받아 영덕으로 유배되었고, 그리고 1659년 유명한 예송논쟁으로 삼수에 유배되었다. 삼수로 유배된 것이 73세 때였고, 거기에서 7년을 보냈다. 해배 후 그의 낙원이었던 보길도 부용동에서 1671년 85세에 눈을 감았다. 유배기간만 총 18년이었다. 유배를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함으로 벼슬을 그만두기 수차례이며, 양전제도의 개혁을 주장한 「양전불보소(量田不報疎)」(1635년), 효종에게 붕당제를 비판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태도를 간언한 「시무팔조소(時務八條訴)」(1652), 훈척대신 원두표를 비판한 「논원두표소(論元斗杓訴)」(1652), 기축사화로 희생된 정개청의 신원을 주장한 「국시소(國是訴)」(1658) 등 그의 관료생활의 파란은 언제나 직설적인 상소문에서 비롯되었다. 1791년 간행된 ⟪고산유고⟫(총6권) 에 수록된 상소만 29편에 이른다. 정적들의 모함에도 일일이 자신을 항변하고 억울함을 토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주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세세히 밝히며 반박했다. 참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논객, 덕분에 윤선도의 공직생활은 상소와 유배, 상소와 파직, 상소와 사직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대와 시기를 가리지 않고 할 말은 하고야 말고, 시작하면 둘러 가지 않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지적하는 감언직설(敢言直說)의 어법은 윤선도의 정치적 삶을 시련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그런 시련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고 초연한 시가 나왔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자연을 벗삼아 세속을 떠나 있는 그의 시조차도 풍경을 꿰뚫고 인간의 근본을 바라보려는 태도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시작하면 끝을 본다, 디테일 천재
상소문도 잘 쓰고, 시도 잘 쓴 윤선도. 글만 잘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잘하는 것이 많았다. 허목(許穆)은 윤선도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경사(經史)와 백가(百家)를 널리 읽었으며 의약·복서·음양·지리 등 연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라고 평했다. 다양한 분야에 걸친 그의 연구는 전문가의 수준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 의학은 왕실 구성원들의 병에 자문을 하고, 주변의 병자들에게 약처방을 할 정도였다. 그가 탄핵상소를 올렸던 원두표가 병이 들어 윤선도에게 처방을 받아 나았다는 일화도 있다. 풍수 역시 정조에게 도선과 무학대사에 버금간다는 찬사를 받을 만큼 전문가였다. 효종의 능자리를 찾는 역할을 맡아, 수원과 여주를 추천했다. 결국 반대파에 의해 효종의 능은 구리 건원릉으로 결정되었으나 붕괴사고로 여주 영릉으로 옮겼다. 윤선도가 낙점했던 수원의 능자리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현륭원의 자리로 지정했다.
윤선도의 풍수 실력은 보길도의 부용동(芙蓉洞)과 금쇄동(金鎖洞)을 알아본 것에서 정점에 이른다. 병자호란 때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듣고 낙망하여 제주도로 향하다가 중간에 정착한 곳이 보길도이다. 그는 보길도에서 부용동을 바라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이 없던 곳인데 연꽃을 포개놓은 듯한 산세를 보고 그가 부용동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거기에 정자를 짓고 연못을 파고, 온갖 나무를 심어 정원을 가꾸었다. 풍수 전문가일 뿐만 아니라 조경 전문가의 면모를 발휘했다. ‘세연정(洗然亭)’이 있는 연못은 과학적 원리에 따라 평소에는 물이 서서히 흐르다가 장마철과 같은 우기에는 수위를 조절하고 폭포를 이루게 설계되었다. 다음은 윤위가 ⟪보길도지⟫(1748)에서 부용동을 설명한 대목이다.
짙은 구름비가 한 달을 계속해도 집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는 습진 기운이 없다. 산에는 사슴, 돼지, 노루 등이 있지만 사나운 범이나 전갈에 대한 걱정은 없고, 나무로는 소나무, 가래나무, 밤나무, 동백나무, 유자나무, 석류나무 등이 있어 사방의 산이 계속해서 푸르다.
|
보길도 <부용동원림(芙蓉洞園林)> (명승) |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의 「자화상」(국보) 자료출처: 국가유산청 |
전체의 풍경과 함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다. 디테일만 있을 때 그것은 지엽말단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의 조화와 그것이 놓일 자리를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태도에서 디테일의 진가는 발휘된다. 윤선도의 박학성과 전문성, 그리고 섬세함은 이런 태도의 총합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소리와 마음이 하나다
윤선도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다음의 시는 그의 음악에 대한 이해를 간명하게 보여준다.
소리는 혹 있은들 마음이 이러하랴
마음은 혹 있은들 소리는 뉘 하나니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를 좋아하노라
- 「반금에게 준다(贈伴琴)」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거문고 명인 권해(權海)와 각별한 교분을 나누었다. 시는 지음(知音)인 권해의 연주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며, 그 자체로 윤선도의 음악론이기도 하다. 소리가 아무리 좋아도 그 안에 마음이 담겨 있어야 하며, 마음이 있다고 해도 그 소리가 제대로 나야 한다. 마음과 소리의 일치, 그것은 또한 기교와 의미의 합치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어부사시사」를 지으며 다음과 같은 시론을 피력하기도 했다.
음향이 말에 상응하지 않고 뜻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은 대저 옛것을 모으는 데 얽매인 탓이다. 따라서 옹색한 결함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내가 그 뜻을 보태고 우리말을 사용해서 <어부사>를 만들어, 사계절을 각 한 편으로 하고, 한 편을 각 10장으로 구성하였다.
농암 이현보와 퇴계 이황의 「어부가」를 언급하며 윤선도는 음향이 말에 상응하지 않고 뜻이 잘 갖추어져 있지 않다고 했다.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한다”는 훈민정음 창제 이유와 같은 맥락이다. 실제로 이현보의 「어부가」는 한글로 썼지만 대부분이 한자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현보의 ‘지국총’은 한자들 사이에서 또 하나의 한자어로 들린다. 일상의 우리말로 쓴 윤선도의 시조에서는 한자어 ‘지국총’에서조차도 리듬과 흥이 느껴진다. 성리학자로 한시에 능한 윤선도에게 자신의 마음을 읊고 노래하기 위해서 우리말 시조가 필요했던 진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한시에 담을 수 없는 마음이 우리말로는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우리말의 문학적 경계를 좀 더 확장하고 국문의 표현력을 향상시켰다”(박희병)는 문학사적 의의가 그 실체를 얻는다. “자기가 생각하고 직접 체험한 생활을 심장으로부터 토로한 시인”(김하명)이라는 평가가 “우리말의 연금술사”라는 평가와 전혀 배치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음의 책들을 참고했다.
고미숙, ⟪윤선도 평전⟫, 한겨레출판, 2012
고영진, ⟪비판적 지식인 윤선도⟫, 푸른역사, 2022
김하명 엮음,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 보리, 2005
박희병,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2⟫, 돌베개, 2023
허경진 옮김, ⟪고산윤선도 시선⟫, 평민사, 2020

윤선도 ⟪고산유고⟫ 권6, 「어부사시사」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