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정보]
(저자) 公六(최남선) (발행처) 新文舘 (발행연도) 1908년(隆熙 2年)
초판.
[목차]
7·5조 4행 67연,
각 연 앞에 숫자, ‘一’에서 ‘六七’끼지 숫자로 목차를 삼았다.
[내용]
7·5조 4행 67연(268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부텰도길ㅅ가디도(京釜鐵道沿路地圖)」와 각 지역 유명 유적지 사진과 설명, 「경부텰도노래곡됴」라는 악보가 실려 있다. 「뎐례말-디은사람 긔록」이라는 ‘일러두기’와 「원글에는」이라는 ‘정오표’가 부록으로 딸려 있다. 마지막 창가 67장이 끝나고 박스 처리해서 “삼가 이 노래를 어린 학생 여러분에게 드리옵니다.”라는 헌사를 바쳤다.
[자료의 특성 및 가치]
국립한국문학관 소장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는 1908년 5월 10일 발간된 초판본 3간(刊)이다. 1905년 5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된 후 1908년 3월 25일 신문관에서 단행본으로 발행한 장시 형태의 7·5조 4행 창가다. 석 달도 안 되어 3간을 찍었다는 것은 이 노래책이 인기가 인기가 많았음을 보여 준다. 1900년 일본에서 행진곡풍의 「철도창가」가 유행하여 한국ㆍ중국 등의 학교 창가나 혁명가곡 등에 영향을 주었다. 남대문역에서 부산역까지 연변 각 지역의 지리ㆍ역사ㆍ풍물ㆍ인정ㆍ사실을 소개하는 창가로, 7·5조 4행 67연(268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연 앞에 숫자를 붙였다. 책 표지를 선으로 9등분하여 정가운데 세로쓰기로 '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라는 제목이 있다. 상단에 하프 모양의 악기가 그려져 있고, 1연 앞쪽에 「경부텰도노래곡됴」라는 악보[4분의 2박자 4절로 된 부곡(附曲)]를 넣어서 이 창가의 지식과 감정이 노래로 각인되고 널리 불려지기를 바랐던 것이다. 표지 양옆에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네이션(국토, 국민, 민족)을 상징하고, 앞표지 하단의 ‘꽃 세계’와 뒤표지의 ‘지구본 이미지’가 근대 문명과 세계성을 표상하고 있다.
표지를 넘기면 「경부텰도길ㅅ가디도(京釜鐵道沿路地圖)」가 나오는데 서울부터 부산까지 철도를 중심으로 도로, 산맥, 하천 등을 표시하여 국토(나라)를 시각적으로 표상하였다. 창가 각 연 아래는 가사에 나오는 명승고적의 사진이나 해설을 달아 국토를 심층적으로 감각하도록 하였다. 노래의 끝(64~67연)에서는 “타고 온 기차/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 “새 기운 나서”, “내 나라 땅 내 것”, “우리가 주장해” 등의 표현을 통해 주체적으로 문명화하고 부흥해 보자는 메시지로 마무리하였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대동맥인 경부연로(京釜沿路)의 명승고적을 노래하여서 남반부의 지리상 형편과 역사상 사실을 교시코자 함이니 그 율조는 새롭고 우아하며 그 맛은 풍요하고도 농후한지라.”(《소년》, 1908.11)라고 최남선이 광고하였다.
[작가소개]
최남선(崔南善, 1890~1957): 시인, 역사가, 저술가, 언론출판인. 자는 공륙(公六), 호는 육당(六堂)ㆍ한샘ㆍ대몽최(大夢崔)ㆍ남악주인(南嶽主人)ㆍ곡교인(曲橋人)ㆍ백운향도(白雲香徒) 등. 서울 중인 집안 출생.
6세 때부터 글방을 다니며 소설과 번역서, 신문 등을 읽었다. 1902년 일본인 경영 경성학당에서 수학하는 한편 일어를 습득했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서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学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学]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고 《대한유학생회보》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와세다대학 모의국회가 조선국왕을 모욕하는 안건을 상정하자 항의하다 퇴학당했다.
1906년 겨울 귀국한 후 출판사 및 인쇄소 신문관(新文舘)을 설립하고 1908년 11월 월간잡지 《소년(少年)》을 창간하였다. 1909년 청년학우회 위원이 되어 전국 지회 관리ㆍ강연하였다. 1910년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조선어 연구와 고전 간행 사업을 펼쳤는데, 조선광문회는 지식인들이 사상과 정보를 나누며 근대적인 ‘민족지(知)’를 창안하려는 모임이었다.
1910년 강제 합방 이후 청년학우회는 해산되고 《소년》도 폐간당하자 《붉은저고리》(1912) ㆍ《아이들보이》(1913)ㆍ《새별》(1914) 등을 발간하고 1914년 종합교양잡지 《청춘(靑春)》을 발간하며 신문화운동을 펼쳐나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1922년에 신문관을 해산하고 동명사(東明社)를 창설하여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간하다가 1924년부터 일간지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였다. 1925년 조선의 역사문화 연구 단체 계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창작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1925)와 국토순례기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1927)를 간행하였다. 1928년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 몰두하였다.
193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8년 만주 만몽일보사(滿蒙日報社) 고문, 1939년 만주 건국대학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일제 말기에는 조선청년들의 학병 권유 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처단법의 대상자가 되어 재판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전사편찬위원회,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고, 저술 활동을 이어갔다.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남선, 《육당최남선전집》, 역락, 2003.
정우택, 《한국근대자유시의 이념과 형성》, 소명출판, 2004.
최현식, 「최남선」, 《약전으로 읽는 문학사(근대문학 100년 연구총서)》, 소명출판, 2008.
이주열, 「「경부철도노래」에 나타난 긍정의식 연구」, 《우리어문연구》 35집, 우리어문학회, 2009, 545–574쪽.
[해제자]
정우택(성균관대학교)








